우리를 비참하게 하는 것들
우리를 비참하게 하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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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uh3388@hanmail.net
  • 승인 2012.12.11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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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천 전남 해남동초교 교사
   
 
▲ 김석천 전남 해남동초교 교사
 
초겨울 찬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때에 대선 열기로 전 국토가 달궈져 있다.

이 뜨거움이 도가니 속에서 질 좋은 금속이 정제(精製)되듯 우리 정치를 제련(製鍊)해 내고 국민의 가슴에 응어리진 멍울들을 풀어내주는 뜨거움이길 소망한다.

지난 해 여름, 뜨거웠던 햇살만큼이나 전 국민의 가슴을 달구어 내며 반향을 일으킨 영화가 있었다. 지금은 제목마저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 버린 영화 ‘도가니’이다.

이 영화는 2005년 한 청각장애인학교에서 발생했던 실화를 토대로 만들어진 영화라고 한다. 남쪽 도시 무진시(霧津市)에 있는 청각장애인학교 ‘자애학원’의 기간제교사로 부임한 젊은 미술교사가 교장과 교사들에게 학대당하는 아이들을 위해서 진실을 밝히는 과정을 그린 영화이다.

안개 많은 도시 무진의 한 학교, 겉으로 보기엔 평온한 것 같은 학교엔 짙은 안개 속처럼 가려진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교사는 부임한 첫날부터 우연히 듣게 된 여자 화장실의 비명소리를 신호탄으로 점차 거대한 폭력의 실체를 알아가게 된다.

성폭행, 성추행 그리고 구타.

힘을 가진 이들이 선택한 대상아들은 가장 힘없는 아이들이었다.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입이 있어도 말할 수 없는, 그러면서도 청순한 눈망울을 가진 이들은 모두가 희생양이었다.

이 사건을 알게 된 교사의 가슴에 도가니처럼 끓어오르는 진실 규명을 위한 분노는 인맥과 돈과 권력의 거대한 카르텔 앞에 부딪히게 된다.

왜 하필이면 도가니라는 제목을 사용했을까?

도가니의 사전적 의미는 ‘주로 쇠붙이를 녹이는 데 쓰는 단단한 흙이나 흑연 따위로 만든 우묵한 그릇’ 내지는 ‘흥분 · 감격 따위로 여러 사람이 열광적으로 들끓는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아마 작가나 감독은 도가니처럼 가슴에 끓어오르는 ‘그 무엇?’을 억제하지 못하고 학교라는 제한된 구역에서 일어난 한 사례를 재구성하여 상징화시켰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도가니는 학연, 지연, 혈연, 권력, 돈 등으로 철옹성(鐵瓮城)을 쌓고 있는 기득권 부류와 그것을 알면서도 침묵하고 동조하는 공권력이 엉클어진 우리 사회의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우리 사회엔 감추어졌거나 잠재되어 있거나 힘에 의해 덮여져 버렸거나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기만을 기다리는 일들, 거짓과 권력이라는 이름의 폭력 그리고 민초(民草)들의 가슴을 멍들게 한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한 때는 도가니처럼 끓어오르다가도 식어버린 기억들은 또 얼마인가?

지난 역사는 대부분 힘이 진실이 되어 왔다. 그러나 영원히 묻혀버릴 것만 같았던 거짓도 시간이 흐르면 제 모습을 드러내게 마련이다.

이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귓전을 울렸던 대사가 지금도 들리고 있다.

‘우리가 싸우는 것은 거짓을 밝혀내려는 것이라기보다는 거짓에 물들지 않기 위해서이다.’

진실은 그것이 규명되어지지 않더라도 진실이다. 거짓은 그것이 덮여져도 거짓이다.

돈과 권력이 신의 손처럼 사회를 뒤흔들고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권력이 권력을 옭아매는 현실은 무진학교 학생들처럼 힘없는 이들을 멍들게 하고 그것을 진실이라는 하얀 천으로 덮어버리고 있지는 않은가?

이 무지렁이 같은 가슴에도 아주 오래 전부터 끓고 있는 도가니가 있다.

어디 나 뿐이리오. 민초(民草)들 모두의 가슴 속에도 그런 도가니 하나씩은 품고 있을 법하다.

요즘 권력을 이용한 비리가 자주 비춰지고 있다. 또 상대방을 도가니에 넣고 잡물(雜物)을 들추어내는 장면이 TV화면에 자주 비춰진다.

그런데 어쩐지 가슴이 개운치 않은 것은 그것들이 빙산의 일각 같은 생각이 들고 무진시의 짙은 안개 속에서처럼 희무끄레 하여 동서남북을 정확히 분별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가슴에선 이런 소리가 들린다, 취모구자(吹毛求疵), 아전인수(我田引水)라. 거짓에 물들고 신뢰가 바닥에 떨어진 세상이다. 앞과 뒤를 분별할 수 없는 이야기들로 인해 민초들의 가슴속에 들어 있는 도가니는 진실을 향해 끓어오르고 있다.

오늘 다시 영화 ‘도가니’에서 진실을 위해 싸우다 길을 떠나던 교사의 마지막 말과 행동을 생각한다.

‘우리가 싸우는 것은 거짓을 밝혀내려는 것이라기보다는 거짓에 물들지 않기 위해서이다.’

진실을 밝히기 위해 싸우다 학교를 떠나는 교사의 뒷모습이 너무도 쓸쓸하게 보였었다. 죽어가는 진실을 향해 몸을 던진 그가 너무 외로운 싸움을 했기 때문이며 무진시의 짙은 안개처럼 언제나 실체가 모호한 현실 때문이었다.

우리의 가슴에 품은 도가니가 어떤 것이든지, 우리가 싸우려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 지간에 ‘The end’라는 자막이 떠오르면 어쩔 수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서야 하는 법, 하지만 진실이 드러나기까지 달궈진 도가니는 쉽사리 식지 않을 것이다.

어떤 종류의 싸움이든 전쟁이나 놀음이나 씨름이나 말다툼이나 싸움 그 자체는 슬픈 것도 괴로운 것도 아니다. 항상 싸움의 대가가, 그 결과에 대한 기대가 우리를 비참하게 만든다.(이어령 교수의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중에서 인용)

아마 우리를 비참하게 만드는 것들은 그런 것들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