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저앉고 싶었던 지난날들이 있었다. 그래도 그때마다 나에게 위로와 용기, 힘을 실어주신 따뜻한 사랑의 이웃이 있었다. 이웃의 따뜻한 사랑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고 그 분들의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서 내가 받았던 사랑을 다른 이웃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내 작은 몸이지만 나의 손길이 필요한 분을 위해 살아보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래서 늦게나마 봉사하는 마음으로 복지의 길을 선택했고 광주지방보훈청에서 고령의 국가유공자의 삶을 옆에서 살피고 돌보는 섬김이 일을 시작한지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처음 섬김이 일을 시작했을 때 나의 마음가짐은 확고했다. 국가를 위해 희생하고 공헌하신 국가유공자 어르신들의 아픔을 나누고 기쁨도 같이해 그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는 손과 발이 되자고 다짐했다.
처음으로 국가유공자 어르신 댁을 방문 하던 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초인종을 눌렀는데 어르신이 문을 열며 저를 한참 보고 너무 젊은 사람이 와서 부담스럽다며 거절을 하셨다. 첫 대면에서 거절을 당해 너무 당황스러워 어쩔 줄을 몰랐다. 그래도 같이 갔던 복지사가 나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드렸고, 젊은 사람인만큼 딸같이 며느리같이 잘 대해 드릴 수 있다는 말에 조금은 받아들이셨다.
모든 국가유공자분들이 그렇진 않지만 제가 처음 갔던 그분 집의 환경은 그리 좋지 못했다. 화장실 배수대는 막혀있었고, 집안에는 온갖 나쁜 냄새가 가득차 있었다.
혼자 생활하다 보니 집안에서 담배를 피우고, 오래된 물건들도 그리 치우고 사시진 않았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것쯤이야 하며 여유롭게 받아 넘길 수 있었겠지만, 그때는 당황하고 쉽사리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차츰 시일이 지나면서 암울한 환경들은 나와 어르신의 노력으로 조금씩 나아졌다. 또한 어르신과 함께 지내며 마음을 열고 진실한 대화를 하다 보니 어르신을 이해하게 되었다.
지금은 마음을 터놓고 자녀들이야기며 집안일도 스스럼없이 의논하시고 도움도 청하고, 자녀들에게 못할 말을 터놓고 애기하신다며, 이런 이야기까지 모두 들어주는 섬김이가 있어서 좋다고 한다.
지금은 내가 맡아 찾아뵙고 있는 10여분의 국가유공자 어르신과 모두 친해지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 가는 곳마다 행복하다. 한 어르신은 제 방문을 기다리며 감자나 계란도 쪄 놓으시고, 왕년에 튀김장사를 해서 자녀들을 가르치셨다며 튀김요리를 해주시는 분도 계신다.
몸이 좋지 않아 병원에 입원을 했었는데, 물어물어 찾아와 병문안을 오신분도 계셨다. 내가 해 드리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주시는 어르신들이 계셔 마음이 따뜻해 질 때가 많다.
그 모습들을 볼 때면 제가 더 따뜻하게 보살펴드리고 진짜 가족이 되어야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우리 어르신들 모두가 저에게는 한분한분 소중한 분들이다. 개개인의 성향이나 건강상태, 애로사항, 생활실태, 주거환경 등등 모든 것을 신경 써야하고 개별 맞춤형 서비스를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어르신들은 외로움이 가장 큰 어려움이라고 한다. 그래서 외로움을 덜어드리기 위해 일부러 율동을 하며 노래도 부르고 어르신과 같이 노래 부르자고 조르기도 한다.
처음엔 입을 꼭 다물던 어르신도 같이 따라 노래 부르시며 표정 없던 얼굴이 환한 미소로 바뀐다. 칭찬이라도 하면 소싯적에 나도 잘 놀고 인기가 많았다고 말하신다. 그래서 한바탕 웃기도 한다.
섬김이로 근무하면서 만능 직업인이 되고자 노력하고 있다. 어르신들의 생활에서 도움이 되고 마음에서 조금이나마 위안을 가질수 있도록 가수가 되었다가 무용수가 되기도 하고 웃음치료사가 되기도 한다.
복지서비스라는 것이 아무나 하는 게 아니란 생각도 든다. 어르신들의 위한 일은 마음 없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닌가 보다. 마음을 다해 어르신을 돌본다고는 하지만 어르신들의 마음에 흡족하지 않았을까 늘 반성도 해본다.
국가보훈처에서 국가유공자를 위한 복지서비스인 보비스를 시작한지도 벌써 11년이 되었다. 나라를 위해서 몸을 바쳐 희생하신 그분들을 섬기는 일에 부족함은 없는지 그분들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 사랑하고 봉사하는 나의 초심을 잃지 않았는지 다시 한 번 마음을 다 잡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