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서구문화원, 서창 마지막 뱃사공 흔적 찾아내
광주서구문화원, 서창 마지막 뱃사공 흔적 찾아내
  • 홍갑의 기자
  • kuh3388@hanmail.net
  • 승인 2018.09.13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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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덕비 안내표지판 없이 길가에 먼지 뒤덮여

▲ 서창 마지막 뱃사공 고 박호련 씨 <사진=서구문화원 제공>
[데일리모닝] 홍갑의 기자 = 광주시 서구 서창동의 서창나루 마지막 뱃사공으로 알려진 박호련의 행적을 최근 서구문화원에서 찾아내 공개했다.

박호련은 그동안 일제강점기 시절 서창나루 뱃사공으로 일하다 돈을 모아 서창민들이 춘궁기와 가뭄 등으로 어렵고 고향을 떠나려 할 때 쌀과 돈을 출연해 지역민들을 구제하는 등 나눔을 실천했다는 정도로 알려졌다.

이같은 선행으로 1925년과 1929년 두 번에 걸쳐 서창민들이 여기에 감사하다는 뜻으로 마을에 ‘박호련시혜불망비’라는 비석을 두 개나 세웠다. 이 비는 현재 서창치안센터 건너편에 나란히 세워져 있다.

서구문화원(원장 정인서)은 광주에서 나눔의 상징이 되고 있는 박호련에 대한 행적을 지난 1년여간 조사 끝에 최근 일제강점기 때 발행된 중외일보 1930년 1월 22일자에 그의 행적을 보도한 신문기사를 찾았다.

▲ 광주시 서구 서창동 서창치안센터 앞에 세워진 박호련 시혜불망비<사진=서구문화원 제공>
당시 중외일보에 따르면 ‘희세(稀世)의 자선가 박호련씨 기념비, 광주 서창면 12구민의 감사루(感謝淚)의 결정(結晶)으로’라는 제목으로 사진과 함께 95줄에 걸쳐 실려 있었다.

이 기사의 내용은 1월 19일 이회춘 서창면장의 주관으로 200여명의 서창민들이 모여 김병두(金炳斗), 설병호(薛炳浩) 등의 축사와 축하음악이 있었고 박 씨의 과거를 소개했다.

박 씨는 어려운 가정에서 부채가 많아 아내와 함께 고향을 몰래 떠났다가 타지에서 3년여 동안 생활하다 지쳐 돌아와 채권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뱃사공부터 시작해 정미소를 운영하는 등 고생 끝에 천석꾼이 될 만한 돈을 벌었다.

당시 서창지역이 가뭄 등으로 생활고를 겪는 동네사람들에게 자신의 어려웠던 시절을 생각하고 두 번에 걸쳐 쌀을 내놓고 돈까지 내놓는 등 나눔을 실천했다는 것이다.

당시 이회춘 면장은 이양우 전 전남도교육감의 부친으로 알려졌다.

서구문화원은 추가로 수소문을 통해 박호련의 후손이 나주 영산포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후손은 종손의 부인만이 살아있었다.

이 사실을 제공한 서창동 발산마을 곽창기 씨는 “박호련 씨가 처 외할아버지로 손자는 죽고 부인만이 영산포에 살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곽 씨를 통해 박호련의 족보와 사진을 입수해 확인한 결과 박호련은 반남박씨이며 1892년 2월 11일 출생해 해방 후인 1946년 11월 25일 세상을 떠난 것으로 기록되었다.

부인은 정룡운(1892~1927)과의 사이에 1남3녀를 두었고 첫 부인이 죽자 이듬해 두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 1남을 두었다.

서창치안센터 앞에 있는 2개의 비는 “아기고 아껴서 남으면 가난을 구제해야 한다”라든가 “남의 굶주림을 자기 일로 여겨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정인서 서구문화원장은 “고관대작도 아니고 지역의 명망가도 아닌 평면에게 마을 사람들이 비석을 2개나 세웠다는 사실 자체가 나눔의 큰 뜻을 알리고 싶은 것이다”면서 “찻길 옆에 세워져 먼지에 뒤덮이게 둘 것이 아니라 하루빨리 서창한옥문화관 등 사람들이 쉽게 볼 수 있는 곳에 옮겨 그 나눔의 뜻을 기려야 옳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