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장미
여름 장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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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uh3388@dmorning.kr
  • 승인 2023.05.18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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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원 유미란 시인
전남 여수시 화정면 낭도리 향원의 시시한 꿈뜰에 장미가 만발해있다(사진 = 향원 유미란 시인 제공)
전남 여수시 화정면 낭도리 향원의 시시한 꿈뜰에 장미가 만발해있다(사진 = 향원 유미란 시인 제공)

'장미가 핀다' 는 소리를 들으면

언제 어디서건 괜히 가슴이 설렌다.

길을 걷다가 지나가는 사람이

장미라고 말하는 소리를 흘깃 듣기라도 하면

처음 보는 그의 뒷모습이 어쩐지 낯익고,

가곡집을 넘기다가 부를 줄도 모르는

'장미의 아침' 이란 노래의 악보만 보아도

벌써 숨을 죽이게 되며

가사도 모르는 '장미 꽃이 필때' 라는 불란서

노래만 들어도 안절부절하며 괜시리 가슴이

죄어 오는 것이다.

장미ᆢ장미라ㆍ ㆍ ㆍ

어느 저녁 책상머리의 장미

넝쿨 이파리처럼 짙은 깃이 씌워진

스텐 글라스 장미 전등 앞에서

나즈막하게 그의 이름을 불러보며

나는 구체적으로 시골집 장미를

떠올려 보려고 애쓴다.

하나,

초여름 볕 아래 내 옛집의 아담한 마당에

다발다발 널려있던 그 핏빛의 자그만

꽃송이들은 얼핏 떠오르지 않고

우리 집 좁은 화단의 기형적으로

큼직한 빛깔마저 어정쩡하게

분홍도 빨강도 아닌 그런 꽃송이를

쉽사리 연상하게 되어 설레던 가슴은

이내 실망으로 가득 차게 된다.

어쩌면, 장미는 정말 본래가 그렇게

큰 꽃송이고 빛깔도 분홍에, 노랑에, 주황에

그런 색깔들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옛부터 장미의 예찬을 보내는 이들의

그 경탄의 대상이 바로 그런 장미인지도

모르는 것이며

골목길에서 어울려 놀고 있는 동네 꼬마들은

사뭇 위협적인 높은 담벼락에 기어올라

봄부터 가을까지 꽃을 피워대는 그런

줄장미를 보고는 숨을 죽이고

눈을 반짝이며 나름대로의 동심을

이뤄나가는지도 모를 일이다ㆍ

둘,

아직도 나의 어리석은 가슴에는 장미라면

이미 사람들의 눈에서 멀어진 그 재래종의

자잘한 핏빛 꽃송이여야 하고,

그것도 초여름 햇볕을 함뿍 먹은

깊디깊은 강렬한 것이어야 하며

나를 바라보는 너의 눈빛도 예전 처럼 맑고

깊지를 못하여 이제 나는 전처럼

무엇을 너무 사랑할 수 없게 되었고,

어느새 나의 가슴은 열정대신 애틋함이

자리하게 되어 버렸지만

그래도 아직까진 그 흔해빠진 핏빛 장미는

내 가슴을 저리게도 하고, 꽃송이에

연연해하다 밤잠을 설치기도 하며

피고 지는 추락의 연습을 거듭하는 순간

순간을 지켜볼 때면

나의 가슴은 그를 더욱 소중히 여기게 되고

단 한 송이의 꽃도 함부로 꺾을 수도

꺾어서도 안 되는 핏빛 꽃송이에

나는 이미 오래전

기울고 흔들려 포로가 되어버린 오월ㆍ

영혼을 울리는 연초록 빗방울이

여린 꽃잎을 두드리며 연주하는

감미로운 재즈 음악 리듬에 맞춰

나는 몸을 흔들고 음치 같은 노래도 부르며

뜨거웠던 시절 나도 모르게 가슴에서

사라지고 잊혀진 얼굴들을 기억해

내보려 애써보지만, 기억해 내더라도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 없는 일

핏빛 꽃송이에 연연한 탓이라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