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끝소녀'의 서울대 생존기
'땅끝소녀'의 서울대 생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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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uh3388@hanmail.net
  • 승인 2011.09.28 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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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정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인문계열1
   
 
▲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인문계열1 김태정
 
이 글은 전남 해남고 출신 서울대 김태정 양이 1학기 성적 All A+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해남고 조태형 교장이 2012학년도 전형을 앞둔 시점에서 학생들에게 꿈을 나눠 갖자는 취지로 받은 글을 게재함을 먼저 알립니다. <편집자 주>

서울대엔 ‘3대 바보’에 관한 우스갯소리가 있다.

서울대입구역에서 내려 학교까지 걸어오는 사람(생각보다 꽤나 멀다.), 학교 축제에 오는 사람, 마지막으로 고등학교 때 전교일등이었다고 자랑하는 사람은 바보취급 당하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고교 시절, 이 농담을 처음 접하곤 ‘아, 전교일등이라고 자랑하는 게 바보라니 정말 멋있다’라고 감탄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의 내가 얼마나 순진했는지는 서울대에 발을 디디는 그 순간부터 처절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신입생 환영회에서 옆에 앉은 친구가 멍해 보였다고? 그녀는 한해에 서울대생을 70명씩 배출하는 D외고의 수재였다. 그렇다면 그 옆은? 아뿔싸, 이번엔 K외고의 '살아있는 전설'이란다. 도무지 만만한 인간이 없다.

어학공부를 하는 인문계열 학생들답게 다들 외고 출신인데다, 몇 년간의 어학연수는 기본, 어학능력 공인시험 만점은 옵션이다. 게다가 해남에서 왔다는 날 붙잡고 시민이 아닌 '군민'이라고 신기해하니 정말 “오메, 환장하겄다”

3월은 이런 대단한 스펙을 지닌 친구들에 대한 부러움, 그에 따른 상대적 박탈감과 싸워야만 했던 시간이었다.

이 아이들과 경쟁할 수 있을까라는 끊임없는 회의감 속에서 베개를 눈물로 적신 밤이 어디 하루 이틀이었겠는가.

시골 일반고 출신이라는 꼬리표와 함께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편견들이 자존심 상했다. 아무도 내가 잘 해내리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이것보다 더 서러운 일은 없었다.

무엇보다 나 자신 역시 스스로를 믿지 못한다는 사실이 분했고 부끄러웠다. 그래서 더더욱 잘하고 싶었다. 문제는 고교시절과 다른 생존전략이 필요함이 분명함에도 어떻게 해야 할지 마땅히 조언을 구할 때가 없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무인도에 던져진 로빈슨마냥 시행착오를 거치며 나만의 방법을 찾아나갈 수밖에 없었다.

대학교는 고등학교 때완 달리 학생이 직접 자신의 시간표를 짠다. 나는 나름의 기준을 세우고 강의계획서, 이미 수강한 학생들의 강의평 등을 꼼꼼하게 분석해 강의를 골랐다.

기준은 두 개였다. 첫째, 재밌어야만 한다. 다들 선배가 추천하는 '학점 잘 나오는' 과목을 택하는데 열을 올렸지만, 나는 그보단 '내가' 재밌게 공부할 수 있는 과목을 택하려 했다. 흥미가 있어야만 어려워도 진득하게 해나갈 수 있는 힘이 생길 것이란 믿음 때문이었다.

둘째, 단순히 시험만 보는 과목보다는 과제가 많은 과목을 택했다. 이는 내가 가진 강점을 최대화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어차피 외국어 실력은 외고 출신이나 해외파가 더 뛰어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기본적으로 서울대생이라면 시험의 고수니 시험만으로 그들과 승부를 보는 것은 실상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과제가 많은 과목을 택하는 것이 내가 가진 장점-매일같이 쏟아지는 과제를 견뎌낼 성실성, 독서와 글쓰기 과제를 즐기는 특이한 성향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길이었다.

이렇게 짠 시간표는 자연스럽게 공부에 대한 흥미를 불러왔다. 이 과목 저 과목 쏟아지는 퀴즈, 독서과제, 에세이들. 주변 친구들은 언제나 숱한 과제들을 짊어지고 다니는 내게 동정을 표했지만, 정작 난 진심으로 재미있었다.

그냥 하루하루 닥친 과제들에 최선을 다하다보면 그 과정에서 소소한 기쁨이 있었다. 꼬박 며칠 밤을 새면서 과제를 할 때면 사서 고생한다 싶다가도, 그렇게 해서 제출한 과제가 우수작이라 칭찬받는 날엔 밥을 안 먹어도 배불렀고 발걸음은 절로 둥둥 떴다.

정답이 정해져 있는 경우가 많은 고등학교 때와 달리,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는 것이 중시되는 대학교에서는 '글쓰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나는 글쓰기 과제만 떨어지면, 바로 그 날부터 중앙도서관으로 달려가 참고서적을 가득 빌렸다. 남들보다 많은 자료를 보고 싶은 욕심에 수십 권의 책, 논문들을 뒤지다 보면 하고 싶은 이야깃거리들이 절로 생겨나게 된다.

그렇게 찾은 자료들을 활용해 글을 쓰되 과제마감일보다 적어도 3~4일 전까지 초고를 완성했다. 마감 전 날 일필휘지로 글을 작성하는 경우를 때로 보는데, 아무리 글을 잘 쓰는 사람이라도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렵다.

던져진 주제 자체가 하룻밤 사이에 뚝딱 생각해낼 수 있는 내용이 아니며, 급히 쓰인 글들은 그 논리나 문장이 빈약할 수밖에 없다.

3~4일 전에 미리 완성을 시키고 다시 여러 번 수정에 수정을 기해야지만 마침내 만족스러운 글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글을 쓰는 과정은 이렇게 길고도 고통스럽지만 마침내 완성에 이르면 그 뿌듯함은 말할 바 없고, 좋은 학점은 덤으로 딸려 오게 된다.

사실 다른 모든 과제, 시험에 있어서도 역시 기본적으로 글을 쓸 때와 같은 부지런하고 성실한 자세를 견지하면 모두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종종 주변에서 대학생활의 상징인 '자유'를 너무 만끽한 나머지 생활의 균형을 잃는 경우를 보게 된다.

하루 이틀 해야 할 일들을 미루다 보면, 공부해야할 분량들이 걷잡을 수없이 많아져서 다들 똑똑한 친구들임에도 도무지 벼락치기로는 감당을 못해내는 것이다.

성공적인 대학생활을 위해서는 스스로 '해야 할 것'과 '하고 싶은 것'을 적절히 조절해나가는 중용의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

모임은 모임대로 참석하더라도, 어떻게든 매일같이 예ㆍ복습, 노트정리, 과제 등은 시간을 쪼개서라도 해야만 하는 것이다.

공부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들이 모여 있는 이곳, 서울대학교. 고등학교 시절 얼마나 끗발 날렸든 이곳에 들어오는 순간 모두는 ‘평범한’ 신입생으로 돌아가게 된다.

공부의 프로들이 모여 경쟁을 하다 보니 평생 일등만 하고 살아온 사람이 C학점 앞에서 좌절하게 되는 경우는 너무나 흔하며, 심지어는 학업 스트레스로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도 자주 본다.

누구나 잘하고 싶은 욕심을 가지고 있기에 이러한 스트레스는 피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스트레스를 견뎌낼 수 있는 힘 역시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공부하는 기쁨’, 그 자체에서 온다고 굳게 믿는다.

과제와 시험이 폭풍처럼 쏟아지더라도 하나씩 헤쳐 나가는 데서 즐거움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 어려움은 충분히 이겨낼 만한 것이 된다. 어렵더라도 당면한 일들을 차분하고 성실하게 해나가는 것, 그리고 그 속에서 작은 즐거움을 찾는 것. 이것이 내가 발견한 서울대에서의 생존법이다.

너무나 기본적인 이야기 같지만 모든 일은 언제나 그렇다. 어떻게 해야 원하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지 길은 너무나 뻔하다. 그러나 막상 그 길을 꾸준하고 성실하게 걷는 것은 어려운 법이다.

한 학기가 끝나자 친구들, 선배들에게 '땅끝'이 한 건 했다고 소문이 쫙 돌았다. 혹시 해남고가 특목고였느냐 묻는 친구들에게 여유 있게 웃어줄 수 있게 되어 기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제 겨우 시작일 뿐임을 잘 안다. 여전히 나는 매일같이 숱한 '천재'들과 '공부벌레'들을 마주한다. 밤잠을 줄여가며 공부할 때면 솔직히 이미 뛰어난 실력을 지닌 그들이 부럽다.

지난 몇 달을 통해 이곳에서도 역시 진리는 통함을 알게 되었기에 두렵지는 않다. 언제나 자신의 자리에게 최선을 다하고 그 과정을 즐길 수만 있다면 분명 좋은 결과를 얻게 된다.

그래, 어떻게든 난 여기에서 살아남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지금처럼 매 순간을 즐기며 최선을 다해 살아갈테다, '땅끝 소녀'답게.

김태정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인문계열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