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선생님! 그 무거움과 두려움에 대하여
<칼럼>선생님! 그 무거움과 두려움에 대하여
  • 데일리모닝
  • kuh3388@hanmail.net
  • 승인 2013.12.24 16:3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류제경 전남 고흥교육지원청 교육장
   
 
▲ 류제경 전남 고흥교육장
 
지금 내 기억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나의 선생님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선생님들의 흠을 잡아 교권의 존엄을 훼손시키려는 의도로 이 글을 쓰는 것은 결코 아님을 전제해야겠다.

‘선생님’이라는 자리에 대한 무거움과 두려움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지금 생각해봐도 너무 심했던 것 같다. 웬 돈을 그렇게 많이 거두셨는지. 시험지 인쇄할 종이 산다고, 책상 페인트칠 한다고, 깨진 유리창 갈아 끼운다고. 그렇게 낸 돈이 장난이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그런 것들은 우리들 호주머니로 해결할 일은 결코 아니었다.

그런 일 뿐만아니라 어린 우리들 가슴에 평생 잊지 못할 특별한 기억들을 많이 남겨 주셨다.

교실 뒤쪽에 조그마한 구멍이 하나 뚫려 있었는데 우리는 선생님이 교실에 안 계실 때면 종종 그 구멍에다 오줌을 누곤 했다.

어느 날, 교무실에 가시다가 갑자기 되돌아오신 선생님께 그때 마침 엎드려 일을 보고 있던 한 아이가 딱 걸렸다.

그 일로 인해 우리 반 아이들은 새로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는데 그것은 사람이 매를 엄청나게 많이 맞으면 입에 거품을 품고 결국은 기절하고 만다는 것이었다.

지금도 그 장면이 너무나 생생하여 평생 잊기는 어려울 것 같다. 모두가 미워했지만 나는 그 선생님을 미워할 수가 없다.

그날 오후 실과 시간에 양배추 밭에 김을 매고 있는데 선생님께서 내 곁에 오시더니 ‘너 많이 아팠지, 반장인 너는 책임이 있어서 다른 사람보다 좀 더 많이 맞은 거야’ 라고 하시며 매를 맞아 부어 오른 종아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그 순간 눈물이 핑 돌았고 그 일로 인해 난 선생님을 지금도 미워할 수가 없다. 그 따뜻한 말씀이 항상 귓가에 맴돌고 있어서. 6학년 때 선생님은 더욱 잊을 수가 없다.

선생님은 내가 닮고 싶은 모델이 되어 주셨다. 내가 교직에 들어선 것은 순전히 6학년 때 담임이신 조태종 선생님 때문이었다.

중학교 입시를 앞 둔 어느 날엔가는 몹시 편찮으셨는데 힘든 몸을 이끌고 교단에 서셨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선생님은 그림을 잘 그리셨고 우리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해 주셨다.

특히 선생님께서 직접 지으신 동화를 많이 들려 주셨는데 하루 일과가 끝나는 밤 8시쯤에 듣는 선생님의 동화는 입시 공부에 지친 우리들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 주었고 행복하게 하루를 마무리 지을 수 있게 해 주었다.

‘정신을 놓고 집을 나가버린 엄마를 찾아 산길을 헤매며 엄마를 애타게 부르는 철이의 애절한 목소리만 메아리 되어 어스름한 골짜기에 멀리 멀리 울러 퍼졌다’로 끝나는 선생님의 이야기에 우리 반 아이들은 그렁그렁 눈물 매달고 소리 없이 훌쩍 거렸는데 지금도 그 장면을 생각하면 코끝이 찡하게 울려옴을 느낀다.

나는 집에서 학교까지 4킬로미터나 되는 먼 길을 혼자 걸어 다녔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손전등도 없이 순전히 감각만으로 산길, 들길, 신작로를 걸어 다녔던 것이다.

산길 옆에는 상엿집이 있었고 그 옆을 지날 때면 음악책에 첫 번째로 나오는 ‘대한의 아들’ 노래를 목이 터져라고 악을 쓰며 불렀는데 그래도 무서움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다 어떤 날은 나도 모르게 내 자신이 선생님의 동화 속 주인공 철이가 되어 엄마 잃은 서러움에 훌쩍 거리며 집으로 돌아오곤 했는데 그럴 때는 상엿집을 언제 지나쳤는지 모를 때도 있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좀 유별난 영어 선생님을 만났다. 당시에 난 ‘토스트’가 무엇인지도 몰랐고 그것을 제과점에서 판다는 사실도 그 선생님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소풍 전날까지 토스트를 사온 학생은 영어 점수를 30점 이상 올려 주겠다고 학생들에게 무척 구미가 당기는 제안을 했다.

선생님은 제안에 응한 학생들의 이름을 일일이 수첩에 기록했다.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돈도 없었지만 거래에 응하자니 좀 창피했고 응하지 않자니 점수가 너무 아까웠다.

결국 점수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나는 내 생애 최초로 제과점 문을 들어서게 되었다.

선생님께서는 왜 그런 제안을 하셨을까. 지금도 그 일을 생각하면 어이가 없어 웃음만 나온다. 교단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은 한마디로 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그 선생님을 생각할 때면 나는 가르치는 자로서의 정도와 도덕성의 무게를 깊이 새기게 된다.

고3 때 담임인 박송기 선생님이 무척 그립다. 나의 진로에 확신을 갖게 해 주셨다. 마음이 따뜻하고 인자하기가 태산 같으신 그런 분이셨다.

여학생들과 같이 생활하게 되면 신경 쓸 일이 너무 많을 것 같아서 남학생 반으로 옮겨 달라고 선생님께 통사정을 했다.

그때 선생님은 웃으시며 남녀 혼반이 얼마나 좋은지는 조금만 지내보면 안다고 다독거려 주셨는데 항상 미소 띤 얼굴에 검은 구레나룻 수염이 인상적이었던 선생님의 모습을 떠올리면 지금도 내 가슴은 한겨울 군불 땐 온돌방처럼 따뜻해진다.

한 사람이 어떤 사람에 대한 기억을 일생동안 간직하고 산다는 것을 만약 그 사람이 안다면 그는 항상 얼마나 찝찝하고 께름칙할까.

그런데 그 기억이 좋지 못한 기억이라면 또 얼마나 불편하고 부담스러울까. 더군다나 잊지 못할 기억을 준 그 당시의 일로 인해 한 사람의 인생이 좋지 않은 방향으로 바뀌게 되었다면 이는 또 얼마나 두렵고 죄스러운 일일까.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겠지만,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사람을 가르치며 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의 사명감과 책무성의 무거움과 두려움이 너무나도 커서 차마 숨조차 쉬기 어려울 정도의 압박감을 느끼게 된다.

희대의 탈주범 신창원은 그의 ‘신창원 907일의 고백’에서, “지금 나를 잡으려고 군대까지 동원하고 엄청난 돈을 쓰는데, 나 같은 놈이 태어나지 않는 방법이 있다.

내가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너, 착한 놈이다’하고 머리 한 번만 쓸어 주었으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5학년 때 선생님이 ‘이 ✕놈의 새끼야, 돈(당시 육성회비) 안 가져 왔는데 뭐 하러 학교에 와, 빨리 꺼져’ 라고 소리쳤는데 그때부터 내 마음속에 악마가 생겼다.”고 고백했다.

이는 만약 그가 좋은 선생님을 만났다면 다른 인생을 살 수도 있었으리라는 것을 예측하기에 충분하다.

선생님의 말 한마디가 철없는 어린 아이의 가슴에 날카로운 비수로 박혀 증오의 씨앗으로 자람으로써 결국은 한 인간을 파멸의 길로 내몰게 했음을 신창원은 증언하고 있다.

교직은 바로 그런 자리이고, 선생님은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다. 나의 경우처럼 아이들은 자기들 선생님에 대한 기억을 평생 동안 가슴에 담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 선생님의 영향으로 그들의 인생은 여러 가지로 바뀌기도 한다. 결국 교직은 사람의 삶을 재단하고 디자인하는 일이니 누가 감히 교직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가장 무겁고 두렵고 힘든 일은 교직에 종사하는 일임이 틀림없다.

교직은 그런 책무성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기에 선생님은 아무나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

교직을 수행하는 선생님들이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자질은 아이들에게 항상 감동으로 다가 설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 올바른 삶의 길을 걷도록 끊임없이 격려해 주어야 한다.

언행 속에 항상 감동이 스며있어야 한다. 감동은 인간의 가장 진실된 마음으로부터 비롯되는 심리적 기재이다. 감동이 없는 가르침은 학생들에게 진정한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

감동은 이해와 역지사지, 사랑을 속성으로 한다. 감동이 수반된 언어는 인간의 마음과 행동을 내면 깊숙한 곳으로 부터 변화시키는 힘을 가진다.

교육이 의도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감동 속에 스며 있는 것이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교육현장의 피폐가 심각한 상황에서 교육의 본질적 목적을 달성하고, 교단이 본래의 자리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감동 있는 교육’의 실현이 절실히 요구된다.

미국 테네시주 한 초등학교 5학년생인 모리스는 항암 치료를 받느라고 머리카락이 모두 빠져버렸다.

학생들은 모리스를 돕기 위해 치료비 모금 운동에 나섰고, 이런 모습을 본 백발의 교장 선생님은 조회 때 단상에 올라 머리를 밀었다. 머리카락이 빠진 모리스에게 용기를 주고 학생들의 치료비 모금 운동을 격려하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여선생님들까지도 잇달아 단상으로 올라가 삭발을 했다. 이런 모습을 지켜 본 전교생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모리스의 건강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모금액이 목표액을 훌쩍 넘어 선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목포의 한 초등학교에 근무하는 교장선생님은 누구보다도 일찍 출근하신다. 그는 매일 아침 교문에서 등교하는 아이들을 맞아 포근하게 안아 주기도 하고 힘차게 하이파이브를 해 주며 열심히 하라고 격려해 주신다.

운동회 날에는 교장, 교감 선생님이 붕어빵을 굽고, 솜사탕을 만들어 상품으로 주신다.

이런 멋진 선생님들과 함께 사는 아이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아이들의 인생에 영원히 기억되는 그런 감동을 주고 행복을 주는 학교가 아닐 수 없다.

이런 것이 우리가 추구해야할 진정한 교육이요, 우리들이 지향해야 할 참교육자의 모습이리라.

나의 선생님들, 나의 오늘이 있게 해 주신 선생님들은 모두 나에게 깊은 감동을 주셨다.

그런 선생님들께서 주신 감동은 오래도록 가슴 속에 살아남아 나의 인생을 개척해 나아갈 때 때로는 등대가 되었고, 때로는 이정표가 되어 주셨다.

바라 건데 교단을 지키는 선생님들 모두가 평생 당신의 모습을 가슴에 담고 살아갈 우리 아이들에게 진한 감동을 주는 선생님으로 기억되었으면 한다.

또 한 해의 끝자락에 섰다. 세월은 화살처럼 빠르다. 누군가는 말하기를 시간은 자기 나이와 같은 속도로 흘러간다고 했다.

이 만큼 살아보니 그 말이 진리인 것 같다. 서른 즈음에는 세월이 더디게만 흘러가더니 지금은 시속 60마일로 정신없이 지나가고 있다.

올해도 세월은 그렇게 속절없이 흘러갔다. 법정 스님은 말씀하시기를 우리에게 있어 세월은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네 삶에서 빠져 나간다고 했다.

나에게 주어진 삶의 총량에서 한 해 한 해가 사라지고 있으니 옳은 말씀 아닌가. 한 해가 저무는 마당에서 올 한해 자기 자신에게서 빠져나간 세월과 시간을 잠시 살펴보는 것은 어떨까.

진정 나는 우리 아이들의 가슴 속에 어떤 선생님으로 새겨지고 있는가를 찾아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