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교육 현실, 어렵다고만 할 것인가?
우리 교육 현실, 어렵다고만 할 것인가?
  • 홍갑의 기자
  • kuh3388@hanmail.net
  • 승인 2013.06.24 13: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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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호 전남도교육청 무지개학교담당 장학관
   
 
▲ 장병호 전남도교육청 무지개학교담당 장학관
 
“어려운 여건 속에서 학생교육에 얼마나 수고가 많으십니까?”

교원 연찬회 때 강사들로부터 자주 듣는 이야기다. 그럴 때면 나는 별로 마땅치 않은 느낌이 든다. 요즘 교육 현장에 장애요인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형편이 옛날보다는 훨씬 나아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교실마다 화상 수업을 할 수 있도록 컴퓨터 기기와 대형 모니터가 설치되어 있고, 여름이건 겨울이건 철따라 실내온도를 조절할 수 있는 냉·난방기가 갖춰져 있다.

화장실에도 눈부신 타일 장식에 수세식으로 꾸며져 있고, 비데 설치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

그뿐인가. 구내식당에서는 끼니에 맞춰 급식이 제공되며, 시골 조그만 학교까지도 실내체육관이 갖춰져서 날씨에 구애 받지 않고 체육활동을 할 수 있다.

옛날이야기를 해서 안 됐지만, 내가 학교에 다니던 1960~70년대 무렵만 해도 학교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발을 디딜 때마다 삐거덕 소리가 나는 마룻바닥, 이음매가 느슨해져 제멋대로 흔들거리는 목제 책걸상, 아귀가 맞지 않은 유리창은 바람에 덜컹거리고, 습자지를 잘라 붙인 깨진 유리창 틈새로는 칼바람이 몰아쳤다.

점심시간에 알루미늄 도시락을 열고 김치 냄새 풍기며 차갑게 굳은 보리밥을 목에 넘기고 나면, 몸은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위아래 이빨이 절로 마주치며 딱따구리 소리를 내곤 했다.

화장실은 또 어떠했던가. 학교 뒤편의 재래식 변소는 악취가 진동했고, 여름철 구물거리던 구더기와 쉬파리가 들끓던 모습을 요즘 학생들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그 시절 학교 건물은 어디 가나 흰색에 네모난 성냥갑 모양이었지만 요즘 새로 짓는 학교는 울긋불긋 화려한 색상과 다양한 모양새로 개성을 살리고 있다.

운동장도 예전에는 물 빠짐이 좋지 않아 비만 오면 신발에 진흙이 달라붙곤 했지만 지금은 새파란 잔디운동장이 보기만 해도 시원스럽다. 참으로 하늘과 땅만큼 달라진 모습이다.

교직에 대한 선호도도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옛날에는 어지간한 일자리만 생겼다 하면 헌신짝처럼 내던져버릴 만큼 교사의 이직률이 높았다.

그렇지만 이제는 학생들의 진로희망이나 교사 임용시험 경쟁률에서 볼 수 있듯이 가장 선망하는 직종이 되지 않았는가.

그렇다고 교직이 거저먹는 직업은 아니다. “애들 무서워서 선생 노릇 못해 먹겠어요!” 요즘 이런 푸념을 하는 분들이 많다.

선생님의 그림자도 함부로 밟지 않던 옛 시절과는 달리 요즘 학생들은 영악하고 되바라져서 선생님한테 막무가내로 대드는 판국이다.

애들이 고분고분한 맛이 없고 고개 뻣뻣이 쳐들고 말대꾸를 하니 속이 상하고 가르칠 맛이 나지 않는다. 요즘 학교교육이 어렵다는 것은 이 점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버르장머리 없는 친구들을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지 않은가. 예의와 염치를 모르는 아이들에게 바른 예절과 품성을 가르치는 것이 교육자의 본분이 아닌가. 바로 그것 때문에 교사가 존재하는 것이다. 학생 인권에 교권이 짓눌리고 있는 형편이지만, 그렇다고 사람 만들기를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지난 시절을 돌이켜 보라!

우리 선조들은 국난의 가시밭길 속에서도 교육의 꽃을 피웠다. 일제 강점기 때는 감시의 눈을 피해 우리말과 글을 가르치며 민족혼을 일깨웠고, 6.25 전쟁 때는 포성이 울리는 피난지 천막 속에서 분필을 놓지 않고 가르침을 이어갔다.

시간외 수당이니 보충수업 수당 같은 것은 용어마저도 없던 시절이었지만 호롱불 심지를 돋우어가며 제자 키우는 재미로 밤 깊어가는 줄을 모르던 때가 있었다.

사실 그 덕분에 오늘날 우리나라가 세계인이 놀라워하는 성장을 이루어낸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앞으로 더욱 잘사는 나라, 행복한 삶을 위해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또 무엇이겠는가?

오늘날 교육현장에서 어려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그래도 옛날보다는 형편이 많이 나아졌다는 위안을 가지고 직분에 충실을 기하는 것이 교육자의 책무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