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행복의 파랑새
<칼럼>행복의 파랑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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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uh3388@dmorning.kr
  • 승인 2015.01.18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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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호 순천왕운중 교장

▲ 장병호 순천왕운중 교장
[데일리모닝]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찾아가 소개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있다. 두메산골 움막집에서 홀로 약초 같은 것을 캐며 지내는데, 다들 자기 생활에 만족하고 있는 모습이다.

나는 가끔 아내에게 묻는다. “당신이라면 저렇게 살 수 있겠어요?”하면 아내는 “아유! 저런 데서 어떻게 살아요? 나는 싫어요.” 말도 꺼내지 말라는 듯이 고개를 흔든다.

“그래도 저 사람 표정을 봐요. 아무 걱정도 없이 즐거워 보이잖아요.”, “어쩔 수 없으니까 저렇게 사는 거지, 요즘 같이 좋은 세상에 뭐 하러 산골짜기에서 고생하고 살아요.”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곳에서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사는 모습이 불편해 보이는 모양이다. 원래 아내는 시골 태생이면서도 시골생활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자연 속에 파묻혀 살아가는 모습이 괜찮아 보인다. ‘안빈낙도’라는 말이 있듯이, 먹는 것이나 입는 것이 넉넉지 못할지라도 마음이 편하고 즐겁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지 않겠는가.

요즘 너도나도 ‘행복’이라는 말을 많이 쓰고 있다. 정부에서도 ‘국민행복’을 구호로 내걸고, ‘행복기금’이니 ‘행복주택’이니 하는 말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교육계에서도 ‘행복학교’니 ‘행복수업’이니 하는 말을 자주 쓰고 있다. 특히 상품 광고에서 행복을 입버릇처럼 들먹인다. 가전제품은 편리한 기능을 내세우고, 아파트는 안락과 쾌적함을 앞세우며, 백화점에서는 신상품이나 고급상품, 저렴한 가격이 곧장 행복을 보장해주기라도 할 것처럼 떠들어댄다.

그렇지만 행복은 경제성장이나 생활형편만 가지고는 따질 수 없다. 편리와 안락만 가지고도 말할 수 없다.

세계에서 가난하기로 이름난 방글라데시나 부탄의 국민들이 행복지수가 높은 까닭이 무엇인가. 돈 많은 재벌가에서 오히려 다툼과 소송이 끊이지 않는 원인이 무엇인가.

우리 생활에 의식주가 행복의 필요조건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행복의 충분조건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행복에 대해서는 많은 철학자와 사상가들이 정의를 내린 바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Alain, 1868~1951)은 “적은 항상 자기 자신에게 있다. 부질없는 걱정이나 절망, 의기소침이 최대의 적이다.”고 하면서, “오래 서 있으면 누구나 짜증나기 마련이다.

이럴 때 그가 왜 짜증을 내는지 추론하려 들지 말고 의자를 내주는 것이 가장 현명한 일이다.”고 말한다. 세상사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단순하게 생각하고 낙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행복의 비결이라는 뜻이다.

영국의 철학자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은 “지혜로운 자는 걱정할 필요가 있을 때만 걱정한다”고 하면서 편견과 염세주의, 생존경쟁과 권태, 질투, 죄의식과 같은 불행의 원인들을 떨쳐버리라고 요구한다.

아울러 달성할 수 없는 욕구는 깨끗이 단념하고, 자신의 결점에 무감각 해지는 것이 행복의 길이라고 일깨워준다. 쓸데없는 걱정이나 지나친 욕심을 버리라는 이야기다.

티베트의 영적인 스승 달라이라마(Dalai Lama, 1935~ )는 우리가 행복이나 불행을 느끼는 것은 자신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렸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기가 가진 것에 대해 얼마나 만족하느냐가 중요하다면서 개인의 마음가짐에 비중을 두고 있다.

이와 같은 견해를 종합해볼 때, 현재 자기가 처한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행복의 중요한 관건임을 알 수 있다. “사람이 얼마나 행복하게 될 것인지는 자기의 결심에 달려 있다.”는 링컨(Abraham Lincoln, 1809~1965) 의 말도 같은 맥락에서 음미해 볼만하다.

결국 행복은 흔히 재물이나 명예나 권력과 같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서 얻어지지 않고, 마음의 평온과 즐거움과 같은 내면적인 만족감에서 오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다. 행복의 파랑새를 찾아 먼 길을 떠난 주인공이 마침내 그것을 자기 집에서 발견하게 된다는 벨기에 작가 메테를링크(Maurice Maeterlinck, 1862~1949)의 파랑새 이야기처럼 행복은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가까이에 있는 것이다.

깊은 산속에서 산나물이나 캐고 버섯을 따면서 살아가는 자연인이 도시사람들이 보기에는 기인(奇人)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빌딩 숲에 갇혀 자동차 매연 속에 허둥지둥 살아가는 도시인보다는 맑은 공기를 마시고 숲 향내를 맡으며 자유롭게 살아가는 그들이야말로 진정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