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 역사교과서 오류·왜곡 ‘투성이’
국정 역사교과서 오류·왜곡 ‘투성이’
  • 홍갑의 기자
  • kuh3388@hanmail.net
  • 승인 2016.12.01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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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 국정 역사교과서만 오류 400~500건”
학계, “국정홍보물로도 쓰기 어려워…당장 폐기를”

 
[데일리모닝] 홍갑의 기자 = 교육부가 지난달 28일 공개한 국정 역사교과서 현장검토본이 사실 오류와 왜곡으로 얼룩졌다는 주장이다.

역사학자들과 교사들은 국정 역사교과서 현장검토본에 대해 “교학사 교과서 이상의 오류가 발견됐다”며 “국정교과서는 아예 폐기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역사교육연대회의는 30일 서울 서대문로 역사문제연구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정 역사교과서(현장검토본) 분석 결과를 발표했다.

이들은 “오류를 다 셀 수가 없다. 국정교과서라는 점을 떠나 오류와 왜곡이 너무 많아 도저히 교과서로 쓸 수 없는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강성호 한국서양사학회장(순천대 교수)은 “중학교 역사교과서는 페이지당 1.5건 정도의 오류가 나왔다. 1·2권을 합하면 400~500건에 달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신철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공동위원장도 “교학사 교과서의 오류 수준을 능가할 것”이라고 말했다.

역사학자들은 우선 역사적 사실이 틀리게 기술된 부분이 너무 많다고 지적했다.

김태우 전국역사교사모임 회장은 "기초적인 사실의 오류를 보여주는 사례가 부지기수"라면서 "고등학교 한국사 190쪽 안중근 사진과 유묵에 대한 캡션을 보면 안중근의 미완성 논책인 '동양평화론'을 자서전이라고 소개했다"고 지적했다.

또 "한국사 210쪽에 '(통합)임시정부는 대통령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 내무 총장 안창호 등 국내외의...'라고 서술돼 있지만, 1919년 통합 임시정부가 출범한 뒤 안창호의 직책은 노동국 총판이었고 안창호는 1919년 4월 출범한 임시정부에서 내무총장을 맡았다"고 덧붙였다.

김 회장은 "국정 교과서에 대한 반대여론이 압도적인데도 12월 23일까지 의견을 수렴해 현장 적용 방법을 검토하겠다는 교육부의 발표는 시간벌기가 본질"이라면서 "2017년 3월에 강행되면 심각한 혼란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만큼 국정 교과서를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정 교과서 전근대 부분을 검토한 이익주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한국역사연구회 소속)는 "검정 교과서의 체제와 내용, 문제점을 답습했다"며 "부정확하거나 잘못된 서술, 학계에 이미 통용되기 힘든 학설이 포함돼 있다"고 비판했다.

이 교수는 "예컨대 한국사 중 균역법 시행 관련 서술은 상당 부분 부정확하거나 오류이며, 신분제 동요와 관련해 설명한 '대구 지방 주민의 신분 구성 비율'(145쪽)도 이미 학계에서 통용되지 않는 주장"이라고 설명했다.

이준식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은 “변조된 강령을 가져다 썼다”며 “일제강점기 부분에서 찾아낸 오류만 100개가 넘는다”고 말했다.

의도적으로 왜곡한 부분도 발견됐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1946년 전북 정읍을 방문한 자리에서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임시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해 38선 이북에서 소련을 철퇴하도록”이라고 말한 부분은 <한국사>에서 “38선 이남에서도…(이하 동문)”로 바뀌었다.

배경식 역사문제연구소 교수는 “남한단독정부수립론을 의미하는 ‘남방만이라도’라는 문장을 빼고 원문에 없는 문장을 새로 창안 서술했다”며 “이승만의 분단책임론을 회피하기 위한 의도적 서술이 분명하다”고 비판했다.

또한 친일파 범위를 지식인, 예술인, 종교인, 경제인, 친일단체에만 국한하고 군인, 경찰, 사법관료(판검사)와 동아일보사 김성수, 조선일보사 방응모 등 언론사주 등은 뺐다.

현대사 영역에서 박정희 정권 시절 서술은 크게 늘리는 대신 6월항쟁 이후 30년 세월은 줄였다.

역사학자들은 박정희는 23회나 언급됐고, 경제개발계획 성과를 강조했으며 독재 등 ‘과오’는 계속되는 안보위기 때문인 것으로 미화했다고 비판했다.

고고학·고대사 부분에 대한 오류도 도마 위에 올랐다.

고고학·고대사 부분을 검토한 김장석 고고학고대사협의회장은 "한국사 20쪽에 '인류가 사용한 최초의 금속도구는 청동기'라는 서술이 있지만 청동에 앞서 순동이 더 먼저 사용됐다"며 "고고학적으로는 대략 기원전 5000년경에 시작된 순동시대라고 불린다. 집필자의 무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꼬집었다.

또 "16페이지에 '동아시아에서는 서남아시아보다 농경이 늦게 시작되었지만…'는 서술도 맞지 않다"면서 "최근 연구에 따르면 남중국의 쌀 재배는 서남아시아 농경 발생보다 최소한 천년 이상 이르다. 이 사실은 이제 상식으로 통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