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ㆍ18기획설 동의하지 않는다
5ㆍ18기획설 동의하지 않는다
  • 홍갑의
  • kuh3388@hanmail.net
  • 승인 2019.05.16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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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태 전남대학교 교수
최영태 전남대학교 교수
최영태 전남대학교 교수

[데일리모닝] 최영태 전남대 교수 = 김용장 미정보요원과 허장환 보안대 수사관의 양심선언이 다시 우리를 경악케 한다. 1980년 5월 21일 전두환의 사격 명령, 시신을 불태우고 바다에 던지는 일들은 그들의 잔악성에 비추어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탱크, 장갑차, 헬기에 이어 전투기 폭격까지 검토했던 그들이라면 만행을 저지르고도 남았을 것이다.

두 사람의 주장처럼 전두환과 신군부가 정권찬탈을 위해 사전에 치밀하게 기획했다는 주장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 기획의 대상이 처음부터 광주였고 5·18은 그 일환으로 발발했다는 주장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그것을 수긍할 경우 5·18에 대한 지금까지의 해석은 완전히 뒤틀리고 만다. 5·18은 가해자로서 전두환 집단의 만행과 피해자로서 광주시민의 민주항쟁이라는 두 가지 성격을 함께 지니고 있다. 그런데 기획설은 민주주의를 위한 광주시민의 주체적 투쟁행위를 반감시켜버린다.

5·18 기획설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그 논리가 너무 허술하기 때문이다. 1980년 5월 17일 이전까지 민주화운동의 주 무대는 서울이었다. '서울의 봄'이라는 말이 이를 잘 입증해준다.

당연히 전두환이 5·17 조치를 취하면서 가장 두려한 곳은 서울이었다. 공수부대의 대부분을 수도권에 배치한 것이 이를 잘 말해준다. 광주에는 2개 대대만 배치했다.

광주시민들이 김대중 씨의 체포사실을 안 것은 5.18일 정오 무렵 부터였다. 5.18항쟁의 시작인 5월 18일 오전 시위는 김대중 씨 체포와 무관하게 발생했다.

신군부는 충정작전에서 드러나듯 치밀하게 정권찬탈계획을 세웠고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도 조작했지만 처음부터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광주소요와 연결시키려 했다는 주장은 지나치게 결과론적인 해석이다.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5·18과 연결시킨 것은 항쟁과정에서 광주시민들이 ‘김대중 석방’을 강하게 요구했고, 5월 21일 집단발포 후 5·18항쟁이 수습 불가 수준으로 확대되면서부터 였다고 본다.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된 사람 대부분은 서울에서 활동한 사람들이었다.

5·18이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정신적 원동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5·18이 이념으로부터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신군부가 처음부터 5·18을 기획했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광주거리에 북한을 찬양하는 유인물을 뿌리고 그런 구호를 외치게 하면서 5·18을 북한과 연결시키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5·18 기간에 나온 어떤 유인물에도 이념적 오해를 불러일으킬만한 내용은 발견되지 않는다. 고작 독침조작사건 정도가 발생했을 뿐이다. 그것도 도중에 탄로나고 말았다.

범죄행위 등 큰 혼란 상황도 발생하지 않았다. 이는 시민들이 상황을 잘 통제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신군부가 처음부터 5·18을 기획했다면 5월 21일 도청 앞에서 집단발포를 하기 전 시민들로 하여금 먼저 총을 들도록 유도했을 것이다. 그럼 집단발포도 방어 차원에서 정당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민군은 집단발포 후 자위차원에서 총을 들었다.

5·18항쟁의 본질은 광주시민이 신군부의 정권 찬탈 야욕과 비인간적인 학살 행위에 맞서 주체적으로 용감하게 싸웠다는 것이다.

시민군이 총을 든 행위나 5월 27일 새벽의 장렬한 저항은 결코 신군부의 기획과 선동의 결과에 따른 수동적 저항이 아니었다. 그것은 계엄군의 야만적 행위에 대한 자연발생적인 분노와 민주주의를 위한 능동적인 헌신의 결과물이었다.

결론적으로 김용장ㆍ허장환씨의 양심선언 중 전두환의 사격지시와 시신 태우기 등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지만 5·18기획설은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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